일요일 밤
모두가 “불타는 금요일 밤”, “토요일은 즐거워”를 부르짖지만, 일요일 밤만이 가지는 장점이 있다. 당장 내일 출근을 하거나 학교를 가야 된다는 사실이 머리에 적절한 긴장감을 안겨 주어, 잠 못 이루는 밤의 사색을 좀더 효율적으로 만들어 준다. 물론 그 긴장감이 스트레스가 되어 버리면 멍하니 뜬눈으로 밤을 세우고 회사에서, 학교에서 쿨쿨 자는 난감한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하루 종일 거의 이불 속에서 일어나지 않고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었다. 평소 같으면 하루를 돌아보며 스스로를 책망했을 테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을 향한 때늦은 엄한 꾸중은 생각보다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릴 적에는 몸이 아픈 것이 기분 좋은 일이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아프지 않지만 초등학생 때에는 일 년에 한두 번쯤은 감기에 걸려 학교를 빠졌었다. 그런 날 어머니의 병간호를 받으며 이불 옆에 책을 대여섯 권씩 쌓아 놓고 하루종일 이불 속에 있으면 머리가 조금 멍해도 기분 좋은 편안한 느낌을 받는다. 거기에 극진한 병간호와 약기운으로 밤이 될 즈음 몸에 기력이 돌아오면 짜릿한 기분마저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어릴 적에는 가끔 아프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꾀병을 부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라는 여행기를 읽은 이후로 그의 수필집을 계속 찾아서 읽고 있다. 읽기 쉬운 문장만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경계심이 들지만 그래도 편한 것이 좋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반면에 그의 소설은 문체는 비슷하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 몇 번이고 『상실의 시대』를 읽기를 시도했지만 항상 열 몇 페이지 쯤에서 책을 접었다. 아마도 소설 자체를 읽고 싶지 않은 것일거다. 상상력이 없거나 상상할 여유가 없거나.
나이만 한살두살 먹어 어린이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젊은이로, 젊은이에서 그냥 어른으로 바뀌어 간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나에게 기대되는 ‘점잖음’의 수치는 늘어가고, 실수를 해도 ‘아직 미숙하니까’ 하고 이해해주는 너그러움의 양은 자연스레 줄어든다.
그러다 보니 글이 짧아진다. 멋있어 보이는 단어 몇 개를 늘어놓고 겉멋을 내려 하지만 그 안에 내공도 없고 진실도 없다. 젊은이의 글이 주는 가장 큰 매력은 진솔함이다. 누군가 내 글을 보고 미숙한 인생이라 비웃을지언정,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고, 숨기지 않았다는 당돌함이 있어야 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누구에게 보여줘도 심하게 부끄럽지는 않을 만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60세 무라카미의 글은 젊은데, 내가 작년에 썼던 몇몇 글들은 맹맹한데다 고루하기까지 하다.
생각은 길게, 몸은 단단하게, 와인은 조금만.
I think your writing is better than most of the other folks.
It’s so kind of you to say that. Thank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