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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자리

18Jun13

공항에 다녀와서 빌린 차를 반납하고 집으로 걸어온다. 아직까지는 의외로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아마도 새벽의 상쾌한 새소리 때문인 것 같다.

방문을 여는 순간 꽤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 솟아오른다. 외로움.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그리고 나와는 매우 다르게) 마치 아무도 왔다가지 않은 것처럼 깔끔히 정리를 해 놓고 떠났지만, 빈 옷걸이의 허전함과 욕실에서 아직 느껴지는 습도까지는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미국에 나오는 순간부터 나는 늘 혼자였고 5년 동안 한 번도 가족과 함께 미국에 있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것이 너무 익숙했다. MIT 기숙사 방에 처음 들어갔던 순간부터 2주 전 그 방에서 나올 때까지 거기에서 있었던 모든 것은 나의 혼자 힘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래서 그 방에 들어갈 때 외로움이란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고, 그냥 익숙함과 혼자 누리는 편안함만이 있었다.

이번엔 다르다. 이삿짐을 옮길 때, 가구를 사러 갈 때, 짐을 정리할 때, 인터넷/케이블을 설치할 때 아버지가 계속 내 옆에 있었다. 그래서 혼자 남겨진 이 집에서 편안하지가 않다. 여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다. 사물이 주는 기억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이제 13시간 후 나도 유럽으로 떠난다는 것은 천만다행이다. 학회에서 빠듯한 2주를 보내고, 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허겁지겁 다시 짐을 싸고 한국으로 떠날 거다. 그래서 장마철을 맞은 고향의 기분좋은 지루함을 마음껏 맛보고, 돌아올 때에는 설레임과 기대감만을 가지고 오리라. 지금과 같은 감정의 사치는 엄두도 못 낼 만큼, 그 때는 그렇게 다시 바쁜 일상으로 빠져들면 된다.

물리학

25Apr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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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 수학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 전까지 나는 물리학자가 꿈이었다. 그 때 읽었던 “나도 물리학자가 될래요” 라는 책은 아마도 아직 집에 있을 것이다.

대학교 때 물리학과 수업을 (필수인 일반물리학을 제외하고) 하나도 듣지 않았던 것을 지금까지 후회한다. 2-3과목만 더 들었더라도 분명 지금과는 다른 수학자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더 ‘좋은’ 수학자가 되었을지도 모르고.

잠시 쉬는 동안 적어도 양자역학과 standard model를 읽고 수학자들과는 많이 다른 이론 물리학자들의 ‘생각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은 되어야 한다. 순전히 호기심 때문에라도. 적당한 온라인 코스를 찾을 수 있으면 좋을텐데.

생명

19Apr13

MIT에서 온 응급 메일을 방금 받았다. 32동 스타타 센터 건물에서 총기발사가 있어서 경찰이 출동했다는 이야기. 방금 전에 들렸던 사이렌 소리가 그것이었나 보다.

조금 정신이 난다. 그래도 살아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서. 며칠 전 시내에 마라톤 구경을 갔다가 죽었을 수도 있고, 학교에 있다가 총에 맞아 죽었을 수도 있는데 그래도 지금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 이번 보스턴 테러 사건의 희생자 중 한 명은 보스턴 대학교 수학과의 중국인 유학생이었다. 저 먼 아시아에서 태평양을 건너(중국이니까 대서양을 건넜을 수도 있다)와 외로운 대학원 유학 생활을 하는 나와 처지가 똑같은 학생. 그 학생 대신 내가 죽었을 수도 있다. 심장이 아파도 아직 뛰고 있다는 것은 분명 무척이나 운이 좋은 일이고 감사해야 할 일이다.

지금의 내 마음 따위는 저 희생자의 가족, 그리고 수많은 아픈 사람들의 고통에 비하면 별 거 아닌 것을. 그리고 제발 희생자가 없기를, 정말 오랜만에 기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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