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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들어 피아노를 치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보내는 시간이 전보다 많이 늘어났다. 특히 피아노 연습에는 심하다고 생각될 만큼 많이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어렸을 적에 이렇게만 쳤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소리를 낼 수 있을 텐데..)

얼마 전 부터는 노래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들어서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노래하기에 좋은 곡들을 찾았었는데 그럴 때 가장 아쉬워지는 것이 기타의 음색이었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노래들 중 몇몇은 진한 나무향이 나는 기타 반주가 너무 잘 어울려서 피아노로는 도저히 느낌이 살아나지 않았다. 이 때부터 평소에 동경해 왔던 나일론줄 기타를 사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여기에 루시드폴이 라디오에서 무심코 던진 “피아노를 다룰 줄 아는 분들은 기타를 무척 금방 배우시더라구요” 라는 말 한 마디가 더해져 결국 구입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왜 사고 싶어졌는지에 대한 해명.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너무 오랫동안 알아봤다는 것이다. 100달러를 약간 넘는 야마하 기타부터 보기 시작하여 300달러 정도까지는 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많은 유튜브 동영상과 리뷰를 읽고 악기사 홈페이지에서 샘플을 듣고 하는 며칠간의 과정을 거쳤더니, 점점 귀가 좋은 소리에 맛을 들여 버려서 결국

불가리아의 Kremona 라는 악기사에서 만든 $750 짜리 Orpheus Valley Fiesta 라는 수제 기타를 구입하게 되었다. (여기에 TSA case, 발판, 카포, 교재를 합치면 900달러 정도 된다. 나일론 기타는 처음 만져보는 주제에.. )

이 기타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면, 앞판은 solid red cedar, 뒷판과 앞판은 solid indian rosewood 로 만들어져, 모두 gloss finish 되어 있고, 비교적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악기임에도 가격 대 성능비가 좋은 숨겨진 보물로 평가되어 1,000달러가 넘어가는 기타들과도 많이 비교가 된다고 하고 Guitar Center 같은 큰 악기점에서도 사용자평 점수와 판매수 모두 매우 높게 매겨져 있다.

지난 일요일에 주문하여 이번 금요일이 되어서야 도착했는데 지금까지의 소감은 대만족이다. 기대했던 만큼 따뜻하고 깊은 소리가 나고 외관도 아주 고풍스러워서 제대로 칠 줄도 모르는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다. 그래서 연습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게 만드는 악기이니, 이렇게 생각하면 지출이 전혀 아깝지 않다.

지금 연습할 때 쓰고 있는 교재는 아는 형에게 추천받은 The Christopher Parkening Guitar Method 라는 책인데, 얇지만 중요한 부분이 차근차근 잘 정리되어 있어서 나 같은 초보자가 보기에 좋다. 초반부에는 멜로디를 거의 칠 수가 없으므로 지루해질 것을 우려하였는지 teacher/student 파트로 나눠서 듀엣으로 치는 악보들로 구성이 있는 점이 흥미롭다. 나 같은 경우에는 선생님이 없으므로 먼저 teacher 파트를 디지털 피아노로 치면서 녹음을 해 놓은 다음 그 멜로디를 재생해 놓고 거기에 기타로 따라가며 연습하고 있는데, 마치 협연을 하는 느낌이 들어 아주 재미있다.

갓 입문한 단계라 아직 왼손에 굳은살이 생기지 않아서 아프기도 하고, 아주 기본적인 멜로디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답답할 때가 대부분이지만, 참고 넘어가야 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고 있다. 그래도 오늘만 해도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이 느껴졌으니, 이대로 쉬지 않고 연습하면 언젠가는 이 아름다운 악기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한다.

똘레도

30Aug10



– 2004년 겨울. Toledo, Spain.

다치바나 다카시의 『사색기행』을 읽다가 6년 전 스페인 여행이 떠올랐다.

혼자 떠났던 첫 여행. 그 어떤 종류의 슬픔이나 두려움도 나를 누르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만큼 발걸음이 가벼울 수 있었다. 이 동화같은 도시를 걸어다니던 저 순간의 내가 너무 부럽고 그리워서 조금 슬퍼진다. 그 때는 철이 없었던거야, 뭘 몰랐던거야 라고 위로하지만, 저 사진에서 묻어나는 순수한 기쁨을 다시는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잠들기가 쉽지 않다.

최근 들어 유학 생활의 목표 세 가지를 (중요한 순서대로) 운동, 연구, 피아노로 정했는데 요즘 그나마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은 운동도 공부도 아닌 피아노 연습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치고 있는 곡들을 정리해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에 치고 있는 곡들은 다음과 같다. 순서는 연습을 처음 시작한 순서.

  1. Variations on the Kanon – Johann Pachelbel, arranged by George Winston
    유명한 조지 윈스턴의 캐논 변주곡. 고등학교 때부터 쳤던 곡인데, 아직도 가끔씩 친다. 지금까지 적어도 1000번 쯤은 쳤을텐데 아직도 악보를 완전히 외우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사실이다. 요즘에는 물려서 많이 치지도 않다보니 악보를 보고 쳐도 실수가 많이 나온다.
  2. Love Affair – Ennio Morricone
    이 곡도 고등학교 때 치기 시작했을텐데 워낙 좋다보니 아직 악보집에 들어 있다. 비 오는 날, 우울한 날 밤에 헤드폰을 꽂고 혼자 연주하기에는 여전히 이 곡이 최고인 것 같다.
  3. Secret –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삽입곡
    정말 멋진 영화였고, 영화에 너무 잘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영화를 본지 2년이 지나서야 연습을 시도했고 오랜 연습 끝에 지금은 그럭저럭 친다. 내가 악보를 제대로 외우고 있는 거의 유일한 곡.
  4. Nocturne in E-flat major, Op. 9, No. 2 – Frédéric Chopin
    아마 쇼팽의 가장 유명한 녹턴일 것이다. 처음으로 쇼팽의 곡을 칠 수 있게 되어서 굉장히 기뻤었다. 너무 유명해서인지 많이 치면 칠수록 지루해지는 감이 있다.
  5. Nocturne in B-flat minor, Op. 9, No. 1 – Frédéric Chopin
    Op. 9, No. 2 의 악보를 프린트할 때 같이 나와서 연습하게 된 곡. 오른손과 왼손이 불규칙하게 들어맞아서 (오른손이 11번 칠때 왼손이 6번을 친다) 연습할 때 많이 힘들었지만, 그 점 때문에 너무 아름다운 곡이기도 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두 번째 페이지부터 너무 축 늘어지는 느낌이라 첫 번째 페이지만 치게 된다는 것.
  6. Love me – 이루마
    비교적 쉬우면서 예쁜 곡이라 좋다. 물론 그래서 많이 치면 지루해진다.
  7. 애인 있어요 – 이은미
    처음으로 피아노 치며 노래하기에 도전한 곡. 꽤 많이 쳤는데 아직도 어설프다. 피아노 소리와 노래가 독립적이면서도 조화롭게 들리려면 아직 많은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8. A Winter Story – 영화 ‘Love Letter’ 삽입곡
    고등학교 때 잠깐 치다가 말았는데 요즘 러브레터가 다시 보고 싶어지면서 생각이 나서 치고 있다. 뒷부분 연습이 더 필요한데 아주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다.
  9. Nocturne No. 20, Op. Posth. in C-sharp minor – Frédéric Chopin
    정말 좋다. 쇼팽스러운 감성이 물씬 풍기는 곡이고 그만큼 나의 표현력 부족이 적나라하게 느껴져서 계속 연습하게 되는 곡. 쇼팽이 누나인 Ludwika Chopin에게 바친 곡이라 한다. (“To my sister Ludwika, as an exercise before beginning the study of my second Concerto.”) 끝나는 부분에 한 박자에 음표 35개를 집어넣어야 하는 마디가 나오는데 여기에서 원하는 만큼 속도가 나오지 않아서 고민이다.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 사항일텐데, 제대로 치면 너무 예쁜 부분이라 그만큼 더 아쉽다.
  10. I’m in Love (Piano ver.) – 라디(Ra.D)
    라디오에서 처음 듣고 반해 버린 곡. 이 곡으로 ‘라디’라는 가수를 알게 되었다. 최근에 나르샤가 리메이크해서 부른 버전이 대중들에게는 더 알려져 있다. 반주가 어렵지는 않은데 박자가 독특해서 (재즈 같은 느낌)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위에 언급한 10곡 모두 듣기에도 좋고, 나처럼 보통 이하의 음악성을 가지고 평균 정도의 피아노 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연습을 통해 어느 정도 칠 수 있는 곡들이니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연주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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