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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1994년 작 The Romantic Movement 는 국내에서 ‘우리는 사랑일까’ 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 여기가 아닌 곳을 향한 향수병
- 단순한 불만족을 일반화하려는 습성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소설 The Romantic Movement 의 초반부에서 주인공을 이렇게 묘사한다.
To take D. H. Lawrence’s definition, she was a Romantic in being ‘homesick for somewhere else‘ …
찾아 보니 원래는 D. H. Lawrence 의 “The Boy in the Bush“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He was sick with home-sickness as he flung himself into bed. And it seemed to him he was always homesick for some place which he had never known and perhaps never would know. He was always homesick for somewhere else. He always hated where he was, silently but deeply.
다만 언어가 미숙하여 표현할 수 없었던 마음의 한 부분을 정확히 잡아내는 이 구절을 보고 순간 움찔 하면서 왠지 부끄러웠다. 항상 여기가 아닌 다른 어떤 곳을 향한 향수병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난 낭만주의자도 아니고 소년도 아니니 이런 말에 공감할 자격이 없는데 말이다. 😐
It was surprising how simple a transition could be from the thought: ‘I’m unhappy’, to the rather larger thought: ‘Existence on earth is a futile exercise’; how the vulgarity of the complaint ‘No one loves me’ might find itself sublimated into the elegant aphorism ‘Love is an illusion’. The interest lay not so much in whether existence and love were or were not futile [how could any individual possibly claim to know?], but in the way that the catalytic element could be disguised, leaving nothing but a most general, unself-referential maxim.
한국으로 오는 도합 31시간의 살인적인 여정으로 영혼이 반쯤 몸에서 빠져나가 있는 상황에서도, 알랭 드 보통의 뛰어난 관찰력과 해학은 나에게 웃음을 주었다. ‘나는 불행하다’ 에서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무의미하다’ 로, 또는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에서 ‘사랑은 환각이다’ 로 생각이 변환되는 것이 얼마나 빠른지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이 대목에서 웃으면서도 가슴이 쿡쿡 찔려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필즈메달 수상자의 관심을 받다
몇 주 전의 일.
여느 때처럼 아침 강의를 듣고 간단한 점심을 사서 수학과 common room 에서 먹고 있는데,
Simons lecture를 하러 온 2006년도 필즈메달리스트 Andrei Okunkov와 필즈메달 후보로도 거론되는 우리학교 교수 Roman Bezrukavnikov가 함께 걸어 들어오면서 말은 러시아어를 하고, 칠판에는 외계어를 쓰면서 열띤 토론을 하고 있었다.
마냥 신기해서 쳐다보고 있는데 오쿤코프가 자꾸 내 쪽을 흘끔흘끔 돌아보는 것이다.
내가 먹고 있던 $5 짜리 스시롤이 맛있어 보였던 것 같다.
매달림
사람들이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텐데 나는 주로 두 가지 이유로 그것들을 찾는다. 현재를 잊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과 독립적으로) 과거의 기억을 꺼내기 위하여. 두 가지 모두 별로 건전하지는 않은 것들이다.
속편으로 만들어진 영화나 드라마는 아무리 재미가 없다고 해도 꼭 챙겨보고, 특별히 마음에 들었던 것들은 서너 번씩 다시 보는 것은 바로 두 번째 이유 때문이다. 오늘 본 “노다메 칸타빌레”라는 영화는 한국에서도 꽤나 유명한 일본 드라마의 극장판(최종악장 전편) 이다. 물론 예상했던 만큼 훌륭했다. 이 드라마를 처음 보았을 때는 2007년 말에서 2008년 초쯤, 전역을 앞두고 말년휴가다 뭐다 해서 집과 부대를 왔다갔다하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다.
분명히 현실을 잊어버리려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에 영화를 봤을 때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떠올리는 만큼 그 때의 자신을 정확하게 기억하는 방법도 없다.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의 교향곡에 빠져 있을 당시에는 마치 주변의 모든 것들을 잊은 것 같았지만, 마지막 야근을 하면서의 지루함, 곧 사회로 돌아온다는 기대와 불안, 유학에 대한 걱정, 그리고 외로움이 극 중에서 무척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던 베토벤 교향곡 7번 속에 또렷하게 저장되어 있다.
어머니의 병실 바닥에 있던 간이침대에서 이어폰을 끼고 보던 Seinfeld. 마지막 편지를 썼던 날에도 집에서 계속 웃긴 시트콤들을 재생시키고 있었다. 분명 나는 그 당시 킥킥거리고 웃고 있었는데 지금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기억은 즐겁지가 않다. 자대 배치 첫 날 선임 병장 옆에서 각을 잡고 앉아 보았던 연애시대 덕분에 나는 막사 침대 위의 차가운 하얀 색 린넨의 촉감을 떠올릴 수 있고, 첫 외박을 나와 밤을 새워 연애시대를 다시 보았을 때 새벽에 내 방에 들어와 일찍 자는게 좋지 않겠냐고 했었던 어머니를 기억할 수 있다. 밤에 혼자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면서 봤던 비포 선셋은 당시 내 주변에 아무도 없었기에 훨씬 더 아름다웠다.
결국 좋은 영화는 뇌의 바닥 속에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어 그 안에 당시에 가졌던 모든 감정과 생각들을 함께 묻어 버린다. 그것들이 내가 잊고 싶었던 것이었고, 그래서 절실하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그것들을 다시 꺼내 보려 하면 모든 것들이 함께 떠오른다.
그러니 정말 바보같다. 잊어보겠다면서 제대로 잊지도 못 하고, 그러고서는 그것을 나중에 다시 꺼내보고 울고 웃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영화나 소설과 같은 허구들, 특히 그 중에서도 잘 만들어진 것들은 어떤 마약보다도 위험한 것 같다. 적어도 내가 가진 얼마 되지도 않는 사랑을 현실이 아닌 것들에 낭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